말씀묵상

4월 12일(금) 욥기 6장

벧엘교회 2024. 4. 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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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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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이 성급하게 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6:3)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슬픔은 친구들이 함께 느끼거나, 그가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짐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독화살을 욥에게 쏘시는데도, 친구들은 그의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주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짐을 영광으로 바꾸실 날이 올 것이다(고후 4:16~18).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갈 6:2)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어야 한다(눅 10:25~37, 행 16:33). 

욥의 친구들은 가장 필요할 때 말라버리는 사막의 시내와 같았다. 목마른 여행객들은 원기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메말라버린 시내 앞에서 실망하게 된다(6:14~2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배려하지 않으면서, 상처와 실망을 주는 그런 사람들은 아닌가?

7장에서 욥은 쓸데없어 보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왜 그를 살려두셔야 하는 것인가? 그 모든 고난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욥은 자신이 아무 삯도 받지 못하는 지친 삯꾼과도 같다고 느꼈다(7:1~5). 그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났고, 마치 한 호흡같았으며, 사라져 없어지는 구름같았다(7:6~10, 약 4:13~17). 욥이 표적이다(6:4, 7:20).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겨냥하시는 것인가?

욥은 "내가 큰 죄인이라면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던가, 아니면 내 생명을 취해 가시거나 하십시오. 그럼 좀 편히 쉴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6:9~10, 7:15, 20~21). 논리적인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리에 맞는 것이다(사 55:8~9).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는 논쟁이 아니라 격려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는 말이 치유하는 약(잠 12:18)과 같도, 시원하게 하는 물(잠 18:4)과 같이 될 수 있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적당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라(사 50:4). _워렌 위어스비, 「말씀묵상365」

탄식에는 이유가 있다(6:1~7)

욥은 발언의 첫 마디부터 엘리바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응한다. 그의 괴로움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겁다는 것이다 .여기서 '괴로움'(카아스)이라는 단어는 바로 앞에 나온 엘리바스의 발언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받기는 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엘리바스는 '분노'(카아스)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말하지만, 욥에게는 그것이 '괴로움'일 뿐이고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무거운 짐으로 작용한다(2절). 이 괴로움은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겁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정제되지 않고 '거칠' 수밖에 없었다(3절).

4절에서 욥은 자신의 처지가 하나님의 공격의 결과라고 말한다. 전능자가 자신을 향해 쏜 화살이 자신의 몸에 박혀 자신의 영혼이 그것들의 독을 마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공포가 성을 공격하려고 포위하듯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탄식할 수 밖에 없다. 욥은 동물 세계를 예로 들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한다(5절). 풀이 있을 때는 들나귀가 소리치지 않고 꼴이 있을 때는 소가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형편을 음식 섭취의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6~7절). 싱겁고 역겨운 음식은 먹을 수도 없고 만지기도 싫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의 고난은 욥이 생각하기도 싫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고통스런 상황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주시기를(6:8~13)

욥은 자신이 구하고 바라는 것이 이뤄지길 원한다(8절). 그의 '희망'(티크바)은 '죽음의 세계에서 평안히 쉬는 것'이었다(3:13~19). 이는 엘리바스가 '희망'으로 말한 바를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다. 욥의 소망은 '길의 완전함'(4:6)도 아니고 곤경에서 구원도 아니다(5:15~16).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죽음 자체다. 죽음에 대한 갈망을 다양한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9절). 욥은 죽음에 대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참고. 창 3:19; 시 90:3).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으깨시고 먼지로 부수시길 원하고 있따. 또한 자신을 직물로 비유해 하나님이 손을 펴셔서 자신의 생명줄을 끊으시길 바라고 있다(참고. 사 38:12).

10절은 난해 구절 중에 하나다. 여기에 담긴 중심적 사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욥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는 고통 중에도 기뻐 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욥이 이처럼 과격하게 간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숨기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는 확신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라는 엘리바스의 충고를 완강히 거부한다. 만약 그가 엘리바스의 말에 따라 회개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숨기거나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회개하는 대신에 하나님에게 탄식하고 질문하는 길을 택한다.

11~13절에서 욥은 자신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나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갈망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욥은 자신 안에서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보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응답 안에서만 그 해결책이 있다. 

 

이제 너희가 아무것도 아님이 되었다(6:14~21)

욥은 친구들의 '연대감'(헤세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14절은 그 해석이 불분명하다.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진정한 친구는 그가 하나님 경외함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에도 그 연대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는 "친구를 떠난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도 떠난다"로 해석할 수 있다. 모두 고통을 함께 나누며 어려울 때 힘이 돼줘야 하는 친구의 도리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랑의 이중 게명과 맥을 같이 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을 만큼 가깝다는 것이다(막 12:28이하). 

이어지는 진술에서 친구들의 불성실한 모습이 묘사된다. 친구들은 기만적인 시내나 강바닥 즉 '와디'와 같다(15절 참고. 렘 15:18). 물이 있는가 싶다가도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런 와디는 눈이 녹아 흐를 때와 더운 여름철에 바짝 말라 있을 때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16~17절). 물이 가득할 때가 있는가 하면 바짝 마를 때가 있다. 그 변화가 너무 심해 믿고 찾아 갔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대상들도 물을 찾기 위해 행로에서 벗어났다가 물 대신에 메마른 와디를 만나 길을 잃어버린다(18절). '데마'나 '스바'의 상인과 같이 아무리 유명한 무역지 출신의 상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와디에 의존한다면 길을 잃고 수치를 당하며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19~20절). 제아무리 정통한 사람이라도 와디와 같은 '친구들'을 두고 있을 땐 사막에서 만나는 어려움과 같이 될 것이다. 

21절에서 욥은 변덕스럽고 기만적인 와디와 같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그들은 좋은 때에 친구이지 어려운 때에 친구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제 친구들은 욥에게 '아무것도 아님'이 되었다. 한편 "너희가 두려운 것을 보더니 너희가 두려워한다"라는 하반절의 진술은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이해의 가능성이 있다. 먼저 두려운 것을 볼 때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정말로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 제대로 도울 수 없다(F. Horst. BK)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두려운 것에 대해 병자나 재앙을 맞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태도로 설명할 수 있다(G. Fohrer. KAT).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고난에 접촉하지 않기 위해 또는 자신의 불행에 관련되지 않기 위해 가까이 하지 않고 있음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친구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보았을 때 보이는 놀람의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보는 것 즉 그런 고난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고난을 실제적으로 인지한다면, 그들의 현실관과 이에 기초해 형성된 교리는 무너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놀란다. 그리고 열린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놀랄 일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친구들아 제발 돌이키라(6:22~30)

욥은 22~23절에서 자신이 요구하지 않는 것을 열거함으로써 친구들에게 바라는 바를 말한다. 그가 친구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대적에게서 구원하라는 위험스런 행동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깨닫게 해 달라는 것이다(24절). 동정 없는 '올바른 말'이나 '훈계'는 낙심한 자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25절). 낙심한 자의 말을 문제 삼아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바람과 같이 거세고 제대로 걸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26절; 참고. 6:3).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위로다. 그러나 동정 없는 훈계는 고아들을 위해 제비를 뽑으며 친구들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사람과 같다(27절). 고아와 친구들의 어려움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한다. 결국 그들의 행동은 어떤 위로나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고통만 가중시킨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의 태도가 변하기를 바란다28~29절). 친구들은 욥을 제대로 봐야 한다.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에게 어떤 악이 있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29절에서 욥은 '돌이키라'(슈브)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한다. 이제 친구들은 돌아서서 다시 욥을 향해야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지만 시각과 태도의 변화가 동반된 총체적인 돌아섬을 말한다. 친구들이 변화된 시각과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길 원한다. 그들이 욥과 '함께'(with) 침묵하고 있을 땐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욥에게 '대항하고'(against) 욥을 공격하는 지금에는 필요하다. 욥 자신에게도 불의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30절). 따라서 친구들은 욥의 말을 신뢰해야 하고 그의 무죄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욥이 친구들에게 원하는 궁극적인 희망 사항이다. _「두란노HOW주석, 욥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1.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받기는 하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잘못된 말들을 거절하고 있습니까?

 

2. 다른 사람들을 혹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습니까? 변화된 시각과 태도로 바라보는 '돌이킴'(슈브)가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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