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4월 13일(토) 욥기 7장

벧엘교회 2024. 4.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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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가이드

품꾼의 날과 같은 인생(7:1~6)

7장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탄식은 고난 속에 있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 욥의 탄식은 일반적인 인간의 차원에서 시작했다가(1~2절) 구체적인 대상으로 점차 옮겨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욥 자신이다(3~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이 갖고 있는 특별한 질병의 상황을 묘사한다(5~6절). 이렇게 발언이 일반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은 욥 발언의 특징이다. 이것은 욥기가 욥 개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내재된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측면이다(예. 3:20~26).

욥은 인생을 '강제 노역'(챠바)과 같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삶을 '종'(에베드)와 '품꾼'(사키르)의 날들에 비유한다(1~2절). 종과 품꾼의 삶에는 특별히 의미 있는 일이 없다. 그저 날이 저물기를 바라고 하루 품삯을 바란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저녁 때 짧은 휴식과 하루 일에 대한 품삯이 전부다. 욥의 삶도 마찬가지다(3절). 종이나 품꾼과 같이 허무한 달'들이 그의 '유산'이 되었고, '곤고한 밤'들이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잠잘 때 안식을 얻지도 못한다(4절). 휴식을 통해 새 힘을 얻어야 할 시간이 오히려 고통과 번민의 연속이다. 그의 삶에는 일과 안식의 균형이 깨져 있다. 안식일 계명에는 노동에서의 '쉼'과 억압에서의 '해방'의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출 20:8; 신 5:12). 욥에게 그런 쉼과 해방이 없다. 

5절에서 욥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대해 묘사한다. 그의 살은 구더기와 먼지의 딱지로 뒤덮여 있고, 그의 피부는 아물었다가 다시 곪는다. 이런 증상은 흔히 나병이라고 하는 한센병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병은 완전히 낫지 않고 호전과 악화의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의 날은 덧없이 빠르게 흘러간다(6절).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과 같이 빠르게 움직여 나간다. 조금 있으면 옷감이 다 짜이고 자신의 삶은 끝장날 것이다. 6절 하반절은 "희망 없이 끝난다" 혹은 "희망이 사라질 때 끝난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때 '희망'(티크바)은 베틀에 걸려 있는 실을 상징한다(참고. 6:9). 희망이 사라지면 삶이 끝나듯이, 그의 삶은 곧 생명의 실이 잘려나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내 생명은 바람입니다(7:7~10)

이제 욥은 하나님에게 직접 말한다. 그의 처음 외침은 '기억하라'는 것이다(7절).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의 생명이 '바람'(루아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바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짧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신의 상황을 바꿔 놓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좋은 것' 즉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삶은 구름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8~9절). '스올'은 한 번 가면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하는 땅이다(9~10절). 따라서 하나님에게 더 늦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시고 구원해 달라는 요청이 내포돼 있다. 

 

나를 제발 내버려 두십시오(7:11~21)

앞의 단락이 인생의 '무상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과 개입을 이끌어내려 했다면, 이제 욥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 자체를 문제 삼고 나선다. 욥은 고통과 쓰라림으로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11절). '탄식'이란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베스터먼(C. Westermann)의 정의가 그대로 적용된다. 욥은 신화적 동물에 대한 행동에 빗대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지키심'을 비난한다(12절). 고대 중동의 신화에서 '얌'과 '탄닌'은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들의 이름이다. 마치 바빌론의 교훈시 <에누마 엘리쉬>에서 승리의 창조주와 지배자 마르둑이 혼돈과 바다의 용 '티아맛'에 대항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감시하시는 이유를 풍자적으로 묻는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보호가 아니라 계속되는 감시와 억압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가 밤의 안식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지만 하나님은 꿈과 환상으로 놀라게 하신다(13~14절). 엘리바스는 계시가 수여되는 밤의 이상(4:13)을 말했지만, 욥에겐 꿈과 환상이 일어나는 밤이 두려움과 놀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차원에서 욥과 친구들의 발언은 서로 연관되면서도 전혀 다른 경험과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이렇게 탈출구 없는 상황에서 욥은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15절). 욥이 죽음을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숨 막히는 하나님의 감시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떠나심을 간구한다(16절 상반절). '제발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이것은 시편의 전통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시편에선 탄식자들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관심과 개입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욥은 다시금 자신의 삶이 '입김'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허무하고 보잘 것 없음을 덧붙인다(16절 하반절). 이로써 그는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욥은 그 질문들을 통해 쉴 틈을 주지 않는 하나님의 감시의 이유에 대해 묻고 있다(17~21절).

하나님의 계속되는 감시에 대한 탄식(17~19절)에는 시 8:5에 대한 '트라베스티'(잘 알려진 시가의 형식을 풍자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개작한 것)가 들어 있다. 시편 8편에서 기자는 "인간이 무엇이길래 당신은 그를 기억하시고 그를 그렇게 눈여겨 보십니까"라고 물으면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귀중히 여기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욥은 이 질문을 반복하면서 그것의 반대 측면이 돋보이도록 한다. "인간이 무엇이라고 당신은 그를 대단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두시며 아침마다 그를 찾으시고 매순간마다 그를 점검하십니까? 언제까지 나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으시며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영원한 사찰로, 그분의 배려가 억압으로 현실화된다.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는 'Big Brother is watching you'와 같은 참을 수 없은 억압과 영속적인 감시다. 따라서 욥에게는 하나님의 떠나심이 안식이고 구원이다. 그래서 이 탄식의 단락 중심부에서 '죽음에의 갈망'과 '하나님에 대한 떠나심의 요청'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15~16절을 보라).

계속되는 진술(20~21절)에서 욥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하나님이 지금 자신에게 행동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람을 지키는 이시여!'라는 호칭은 여전히 보호자가 아니라 감시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욥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왜 자신에게는 나타나지 않는지를 묻는다(참고. 출 34:6~7).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죽음의 위협에 대한 언급으로 마친다(참고. 10:21~22; 14:20~22; 17:13~16; 21:32~33). 그는 하나님이 너무 늦게 행동하시면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됨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즉각적 행동을 촉구한다. _「두란노HOW주석, 욥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아카데미


1. 말씀이 읽혀지지 않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분명히 나를 위하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때가 있습니까?

 

2. 내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와 상관 없이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를 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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